사회통계학과 아이소타입

공학 지식은 이론과 같은 분석적 도구 및 실험 장치와 같은 물리적 도구로 구성된 수단도구들을 사용해 표적도구, 곧 최종 인공물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조직화된 지식체계’이다. 이러한 공학 지식의 효과적이고 현명한 활용법은 전통적으로 시각소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각적 표상 기법으로서의 도면 꾸러미는 공학자 집단의 상호작용을 위한 시각소통의 기반이다. 그러한 도면 꾸러미를 집단적으로 완성시키기 위한 초기 스케치가 공학적 발상에 필수적이라면, 도면들에 담긴 정보 및 통계 자료의 시각적 재디자인은 공학자 집단과 타분야의 의사소통을 촉진시키는 설득의 기예에 속한다. 이렇듯, 공학의 시각소통은 상호작용, 발상 및 설득이라는 세 측면을 갖는다. 공학자 집단 내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각종 시각적 표상 기법은 공학교육에 제도화되어 있지만, 시각소통의 발상과 설득의 측면은 아니다. 이는 현재 공학교육이 여전히 사회설계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봉사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공학교육 학제에 시각소통을 도입하는 것은 공학교육을 다시 생각하게끔 우리를 자극한다.

1 사회통계학과 아이소타입

칠판과 분필 혹은 화이트보드와 마커가 없는 공학자의 모임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다. 심지어 그러한 것들이 없는 상황에서도 공학자는 손짓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시각화하여 전달하려고 애쓴다. 어느 전자공학자가 자신의 발상을 선배에게 장황하게 설명할 때 선배는 그에게 그만 지껄이고 회로도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시각소통(visual communication)은 공학자들에게 의사소통의 기반이다.

인공물을 디자인하고 생산함으로써 문제의 실천적 해결을 추구하는 공학에서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visual design of information)은 논증을 도와주는 보조 수단 혹은 시각적 추론(visual inference)의 단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케치(sketch)와 같은 시각적 디자인은 모든 창의적 발상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건물의 설계도와 전자회로도 등의 시각적 표상들 자체가 집단 내 상호작용의 공적 기반이 되는 경우는 공학에서 두드러진다. 거기에서 시각은 언어적 이해를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니다. 철자와 같은 상징기호(symbol)나 단어는 오히려 시각적 이해를 도와주는 보조 장치가 된다. 시각소통이 과학적 발견 및 추론과 관련되어 강조되어 왔지만, 시각소통의 폭은 과학보다는 공학에서 더 크다.

시각소통의 수단은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이며, 그 목적은 정보의 공유와 상호교환이다. 여기서 정보의 존재론적 위상을 논할 수는 없다. 의사소통에서 시각적 정보와 언어적 정보가 갖는 성격상의 차이가 중요하기 때문에, 정보는 기억의 단위가 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정도의 정의에 만족하자.기억의 단위와 관계를 맺는 세상의 부분들이 개념적으로 ‘대상’, ‘사실’, ‘사건’ 및 ‘행위’로 분류되는 것과 무관하게, 그것들에 대한 시각경험의 자료화는 가능하다. ‘데이터’(data)라는 자료는 세상의 부분들을 물리적으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의 해독 과정은 그 부분들에 대한 정보를 추출해 내는 작업이다. 시각적 디자인은 그러한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시각적 정보는 형태 지각 차원에서는 언어적 정보보다 직접적일뿐더러, 대상들의 유기적 관계나 역동적 변화는 언어보다는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쉽다. 시각적 정보는 언어 능력을 전제한 여러 개념적 해석에 열려있다는 점에서 탄력적(flexible)이다.

여러 개념적 해석을 허락하는 시각적 정보는 언어적 표현으로 단일하게 명시될 수 없다는 점에서 ‘암묵적(implicit)인 것’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여기서 ‘암묵적인 것’이라는 것은 ‘명시적(explicit)인 것’을 언어적 이해와 연관시켜온 전통에 대비된 것이다. 암묵적인 것과 명시적인 것의 대비는 정보의 차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대비는 정보에 근거한 사고의 상태, 행위자의 관점 및 구성력과 관계된 지식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진위 여부의 판단 대상이 되는 지식과 달리 세상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행위에 개입된 지식은 ‘암묵지’(implicit knowledge)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전체적인 기능에서 단위들의 기능적 연결망을 다루는 지식은 단순히 진위 여부의 명제적 판단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지식을 명제적 판단에 대비된 암묵지라고 할 때 암묵지의 습득과 활용에 효과적인 정보의 디자인은 시각적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지식 자체가 기억의 단위가 될 수 있는 동물에게는 지식의 정보화도 가능하며, 시각적으로 재처리된 암묵지가 일반적으로 기억하기 쉽다. 생활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기는 공학에서 암묵지는 중요하다.이와 함께 시각 정보가 공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분야에 비해서 클 수밖에 없다.

시각소통에서 공학자들의 상호작용 기반은 도면 꾸러미다. 전자공학자들은 원하는 인공물 디자인의 전체 윤곽으로서 초기 회로도를 설계한다. 그들의 사전(lexicon)은 단어들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각종 기하학적 형태들과 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기하학적 형태들은 콘덴서와 저항들을,그리고 선들은 그들 사이의 기능적 관계를 나타낸다. 각종 물리 방정식들과 언어적 표현들만으로는 단위들의 유기적 관계들을 함축적으로 잡아낼 수 없다. 그 관계들은 각종 기하학적 형태들과 선들에 의해 회로도상에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초기 회로도에 빠진 구체적 정보들, 실례로 저항의 극저온 처리법, 무산소 납땜법과 같은 것들은 초기 회로도의 샾드로잉(shop drawing)으로 덧붙여진다. 도면들의 꾸러미 또한 디자인이 인공물로 승화하게끔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그 꾸러미의 시작 혹은 종결부를 장식하는 플로차트는 전체 공정 과정을 다루는 ‘공학 디자인’(engineering design)의 시각적 표상이다.

도면 꾸러미는 공학자들의 상호작용을 위한 시각소통의 기반이다. 그 꾸러미의 비효과적인 정보 디자인 및 정보 누수는 공학자들의 상호작용을 깰 수 있기 때문에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수대교 참사에서 샾드로잉의 부재는 참사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현대 공학에 요구되는 시각소통은 공학자들의 상호작용을 위한 도면 꾸러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설득과 창의적 발상이라는 시각소통의 다른 측면들도 중요하다. 공학의 시각소통이 갖는 세 측면, , 상호작용, 설득과 발상을 교육에 도입할 때 현행 공학교육의 학제는 반성의 대상이 된다. 이를 보이기 위해 먼저 시각소통에서 설득과 상호작용의 두 측면을 구체화하자.

(2) 아이소타입의 교훈

아이소타입(ISOTYPE: International System of Typographic Picture Education) 1930년대에서40년대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오토 노이라트(O. Neurath), 교육학자 마리 라이데마이스터(M. Reidemeister)와 미술가 게르트 아른츠(G. Arntz)를 중심으로 개발된 시각언어체계이다. 아이소타입은 환경 구조의 정보를 담기 위해 구조적으로 단순화된 개별 시각적 기호(visual sign)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계층간 문화적 통합을 추구하는 언어체계이다. 언어체계로서의 아이소타입은 그림원소(pictorial element)들과 원소들의 배열 및 관계에 관한 규칙들로 구성된다. 그림원소가 이름에 대응한다면, 그림원소들의 조합은 진술에 대응한다.

<도식3>

기호로서의 그림원소는 아이콘(icon)과 지표(index)를 합성시킨 것이다. 그것은 문자보다 직접적으로 대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면서 동시에 대상을 둘러싼 환경 정보를 암시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실례로 도식3은 미술가 아른츠가 중심이 되어 만든 1,140개의 그림원소들 중 일부인데, 각 원소는 운송, 생산 및 전쟁체계의 기능 단위를 상징한다. 육상, 수로, 항공, 철로로 나눠진 운송체계의 기능 단위들로서 자전거에서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각 단위들이 상징적으로 시각화되어 있고,전투기를 대표하는 그림원소는 운송체계와 중첩된 전쟁체계에 속하게 된다. 그림원소는 논리적 단위로서의 주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 단위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림원소들의 조합은 그러한 기능 단위들의 관계들로 형성된 사회적 구조를 나타낸다. 이 점에서 아이소타입은 통계 자료에 함축된 정보의 시각적 변환을 다루는 사회통계학의 여러 기법들과 성격을 달리한다.

통계적 도표의 기법들이 설득의 측면에서 통계 정보를 시각적으로 표상할 때 설득 목적 자체가 그 표상에 직접 함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표상은 어디까지나 설득을 위한 분석 장치라는 점에서 원래의 통계적 자료와 대등한 지위를 갖는다. 반면에 시각언어체계로서의 아이소타입은 정보의 평등한 공유를 촉진시킴으로써 사회의 계층간 문화적 통합을 추구한다. 그러한 정보는 공동체 삶을 위한 도구의 사용법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문제의 인식 장치로서도 기능한다. 이 점은 다음의 아이소타입 분석에서 잘 드러난다.

<도식4>

도식4는 특정 지역의 백인 가족과 흑인 가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수입 격차를 설득하기 위한 분석 장치가 아니다. 도식4의 아이소타입은 그러한 격차를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인식시켜 주는 장치이다. 그러한 문제는 타고난 인지적 제한의 범위 안에서 가급적 추론과 분석의 과정 없이 눈에 의해 직접적으로 보는 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인종간 수입 격차의 문제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만 한다면, 그 문제의 분석을 위한 통계 정보 모두가 시각적으로 표현될 필요는 없다. 분석은 보는 이가 아니라 아이소타입을 제작하고 전파시키는 교육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전체 인구 중에서 5000불 이상의 연간 수입은 0.2%에만 해당한다. 사람 모양의 그림요소를 그0.2%에 대응시킬 경우, 그 그림요소는 양적인 측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한 채 사용되어야 한다. 검은색이 흑인 가족을, 흰색이 백인 가족을 상징할 때 각 수입 영역의 상부는 백인 가족들이 차지하고 있다. 1500불 이상의 영역에는 아예 흑인 가족이 없다. 아이소타입의 이해에서 이와 관련된 통계 자료의 정확한 정보는 불필요하다. 심지어 0.2%라는 단위의 의미가 보는 이에게 정확하게 전달될 필요도 없다. 그 양이 일관성을 유지한 채 표상된 경우, 노이라트는 인종간 수입 격차라는 사회 문제가 별다른 분석과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보는 이에게 시각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여겼다. 여러 계층의 집단이 동일한 사회 문제를 놓고 소통하기 위한 선결 조건은 타고난 인지적 제한의 범위 내에서 문제가 표상되어야 한다.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이 그러한 표상 방식을 대표할 수 있다고 할 때 그 디자인은 나이팅게일의 콕스콤브와 달리 설득을 위한 분석 장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 자체의 인식 장치로도 기능해야 하는 것이다.

시각언어로서의 아이소타입체계에서 그림원소들의 디자인과 조합을 다루는 규칙들, 곧 문자적 언어의 문법에 유추될 수 있는 것들은 타고난 인지적 제한 범위 내에서의 ‘시각적 파악’에 관한 것들이다. 여기서 ‘파악’은 언어적 추론을 전제한 ‘이해’ 개념에 대비된 것이다. 그림원소들의 디자인과 조합에 관한 규칙들은 아이소타입의 전신인 ‘그림 통계학의 비엔나 방법론’(Viennese Method of Picture Statistics)의 개요를 100개의 시각적 디자인과 함께 소개한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는 이로 하여금 첫 눈에 핵심 사항을 알게 해주게끔 시각원소들이 디자인되고 배열되어야 한다.첫 눈에 파악되지 않은 것은 두 번째 관찰을 통해 보는 이에게 인지되어야 한다. 노이라트는 공간적 영역, 좌표축, 선분 및 각종 사회통계학의 도식 기법이 그러한 인지에는 비효과적인 것으로 봤다. 시공간적 경험은 연속적 속성을 갖고 있지만, 기억은 경험에서 필요한 것을 단위화하여 잘라낸다. 양적 비교는 선천적 능력으로서의 셈(counting)에 의존할 때 가장 쉽게 파악될 수 있으며,질적 관계 또한 셈 능력에 의해서 파악 가능한 양적 대조 관계로 처리되어야 한다. 통계 자료의 정보를 누수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설득의 분석 장치로서 시각화시키는 통계적 도표 기법과 달리, 아이소타입의 기법은 사회 문제와 관련된 핵심 사항을 만인에게 공유시켜 문제 해결을 위한 집단적 움직임을 자극하려는 교육적 목적을 갖는다. 아이소타입의 교육 목적은 사회적 차원에서는 계층간 문화 통합을 지향한다.

N1. 생활세계의 원활한 기능을 위한 유용한 정보는 시각적으로 처리되어 여러 이질적 집단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그러한 정보는 법과 제도의 사회적 위치에서 새로운 인공물의 사용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사회에서 여러 집단의 공존과 상호작용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N2. 생활세계의 원활한 기능을 위해서 부정적 문제는 도외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 또한 시각 정보로 처리되어 이질적 집단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상호작용의 기반으로서 시각소통은 기존의 체계 유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공유함으로써 체계의 개선을 꾀하는 진보성을 가져야 한다.

공학자 집단에게 시각소통의 상호작용 기반으로 작동하는 도면 꾸러미와 아이소타입을 비교하기에 앞서, N1 N2와 관련해 두 질문만 집고 넘어가자. 시각소통이 문제 해결의 실천적 차원에서 벗어나 권력의 상징물, 선동의 수단 혹은 갈등 완화의 화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이라트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기도 한 이 점은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반영되어 있다.

질문1. 노이라트가 30년대 비엔나 우파 세력에 밀려 네덜란드로 이주한 후, 그리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한 후, 아이소타입의 체계는 정교화되고 국제화되었다. 그런데 사회통계학자들 중 일부는 그 시기를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 역사에서 암흑기로 규정한다.왜 그럴까?

질문2. 노이라트 사후에도 아이소타입은 네덜란드에 남은 미술가 아른츠에 의해 지속적으로 개발되었다. 또 마리 라이데마이스터는 영국에서 아이소타입을 교육학, 특히 아동교육학에 접목시켰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은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게 된다. 왜 그럴까?

질문1은 시각소통에서 설득의 측면과 상호작용의 측면을 구별할 때 사소한 것이다. 설득의 분석 장치로서 통계적 도표 기법들 대부분이 19세기에 집중 개발되었고, 컴퓨터가 시각적 디자인에 도입되기 전까지 새로운 기법들이 생성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사회통계학에서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은 상호작용을 위한 공통 기반으로서의 시각언어라는 위상을 갖지 않는다. 아이소타입에 개입된 기법들은 전통적인 통계적 도표 기법들과 다르다. 시각언어로서의 아이소타입은 이질적 집단간 상호작용의 기반으로 작동함으로써 계층간 문화적 통합을 꾀한다. 일상 언어와 공조하는 대안 언어로서 시각언어의 중요성은 대중매체의 발전과 함께 더욱 중요해졌다. 시각소통에서 정보의 시각적 디자인이 설득을 위한 분석 장치의 기법과 연관될 때 20세기 초반은 암흑기로 여겨질 수도 있다. 반면에 시각적 디자인이 계층간 통합을 위한 시각언어와 연관될 때 노이라트, 라이데마이스터와 아른츠의 시도는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공공기관, 방송, 길거리,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우리는 아이소타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소타입의 개척자들은 최근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는 그 개척자들의 정치적 성향과 관련된다. 그들 모두는 사회주의 계열의 좌파 이념을 갖고 있었고, 지난 세기 냉전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역사적 계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이라트는 1910년대 독일 뮌헨 지역에서 좌파 정부 설립 계획에 참가했다가 추방당했고, 또 비엔나에 귀국해서는 사회주의 계열 잡지 <투쟁>의 편집을 맡았다. 비엔나가 우파 세력에 넘어가자, 그는 라이데마이스터와 아른츠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그의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했다. 히틀러의 득세와 함께 노이라트와 라이데마이스터는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에게는 급진적 좌파라는 상표가 따라다녔고, 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아이소타입과 그를 연결시키는 것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이라트의 아이소타입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양 진영 모두의 입맛에 맞게 재포장되었고, 아이소타입에 담긴 통합 목적 중 N2는 권력 집중이라는 정치적 기제에서 탈피하지 못한 양 진영에 의해 사회의 담론 주제로 부각하지 못했다. 냉전 시대 아이소타입 개척자들의 정치적 성향이 질문2에 대한 하나의 표면적 이유는 되겠지만, 그 이면에는 실천적 맥락의 도덕 담론에서 문제의 인식이 이념에 우선할 수 있다는 인식의 결여가 도사리고 있다.

사회주의자인 노이라트가 개인의 선택보다 공동체를 중요시한다고 할 때 이것은 집단적 획일화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적 경제논리에서 재화로 선택의 자유를 측정하는 것에는 본질적 오류가 있다고 보았다. 사회 속에 기능하는 다양한 계층들은 각자 그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을 갖기 때문에, 그는 자본주의야 말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수준들을 '평균 인간'이라는 환영 속에 감춰버린다고 보았다. 월급 장이라도 직업적 성격을 무시한 채 무차별하게 평균값을 낼 수 없다. 통계는 계층간 차이를 측정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도구이지 절대 '평균 인간'이라는 애매한 것을 산출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산출하는 것이야 말로 노이라트에게는 '통계의 자본주의적 남용'이었다. 아예 현금 거래 경제 체제를 현물 거래에 의한 생산과 분배 체제로 대체시키려는 노이라트의 이상은 분명히 비현실적인 측면을 갖는다. 하지만, 그의 이상 속에 담긴 과학기술 지식의 사회적 사용법은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노이라트는 과학기술 지식이 계층간 문화적 통합에 사용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문제는 전문적 과학기술 지식이 곧바로 그러한 통합의 기반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지식은 타고난 인지적 제한 범위 내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아이소타입의 체계 속에서 기능해야 한다. 아이소타입의 체계는 집단간 상호작용의 공통 기반이며, 그 체계의 목적은 계층간 문화 통합이다. 통합은 해결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의 인식과도 맞물리기 때문에 단순히 정보 공유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를 개선시키는 진보성을 동시에 갖는다.

과학기술의 사용과 시각언어로서의 아이소타입 제작의 주체는 노이라트에게 잘 교육된 엘리트 집단이며, 노이라트는 그런 집단만이 단기간에 사회주의 혁명을 산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혁명이 엘리트 의식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르크스적 혁명 개념에 대한 회의적 입장과 교육에 대한 낙천적 입장을 동시에 담은 ‘사회적 실험으로서의 혁명’ 성격을 갖는다. 계층간 지식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다수는 소수의 권력층에 의해 영원히 제어당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전제한 마르크스적 혁명 개념은 노이라트에게는 너무나 낙천적이며, 또한 지식인에게는 무책임한 것이었다. 역사가 사회주의의 편이라는 보장도 없으며, 실천적 좌파는 사회주의의 역사적 정당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당화하는 것은 시기와 장소에 국한되지 않은 실천 가능성을 사회주의에서 박탈하는 꼴이다. 지식인은 교육자이여 하며, 교육의 목표는 삶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와 부정적 문제가 사회에 공유되게끔 하는 것이다. 교육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계몽의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계층간 소통을 위한 방법론 개발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한 방법론으로 개발된 교육체계는 모든 이에게 손쉽게 접근 가능한 아이소타입과 같은 것이야 한다. 노이라트는 아이소타입의 교육을 통해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극대화된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낙천적이다.

시각언어로서의 아이소타입이 ‘손쉬운 파악’의 관점에서 문자보다 효과적일지라도 ‘사용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반인 모두가 아이소타입의 제작자가 될 수 없으며, 아이소타입의 제작은 많은 경비와 제도적 지원을 요청한다.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그러한 지원은 현실적으로 권력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권력층이 만인이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만 사회에 공유되기를 희망한다면, 그리고 부정적 문제는 공개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아이소타입은 권력층의 이념적 선동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실례로 도식4에 의도적으로 약간의 선동문구나 아이콘을 적절히 삽입시키면, 그것은 인종간 수입 격차라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 선동에 사용될 수도 있다. 실제 아이소타입의 기법은 히틀러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를 선동하는 데, 그리고 스탈린이 그의 독재를 유지하는 데 도용되었다. 이를 인식한 노이라트에게 탈출구는 아이소타입 제작자에게 도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다.

아이소타입 제작자에게 요청되는 도덕적 의무는 노이라트의 사회주의 이상인가? 그렇지 않다. 교육에 대한 그의 낙천적 태도는 역설적으로 아이소타입의 사용이 특정 정치적 이념에 종속되지 말아야 함을 반영한다. 아이소타입의 통합 목적 N1 N2 자체가 논리적으로 특정 정치적 이념을 전제하지도 않지만, 노이라트는 유용한 정보와 풀어야 할 문제의 공유화를 통해 사회주의 이념을 달성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그의 낙천적 태도와 무관하게, 아이소타입의 기법이 여러 정치적 이념의 선동 장치로 도용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문제의 인식은 반드시 특정 이념이나 보편성을 가장한 이론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여전히 이념이나 이론 없이는 문제 해결에 도덕적 가치가 부과될 수 없다고 여긴다. ‘상식을 존중한 상황윤리’는 문제 해결 관점에서의 도덕 담론틀로 제안된 것이며, 거기에 그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보편성을 가장한 이론도 전제되지 않았다. 여기서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을 차지하는상식을 존중한 상황윤리의 논증체계를 펼쳐 보일 수는 없다. )

복잡성의 증가를 따르는 인공 환경의 진화로 과거보다 계층간 분화가 심화된 현대에 소통은 중요한 주제다. 하지만, 상황 요인에 근거한 문제의 인식이 정치적 이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 자체가 그러한 인식의 고려 대상일 뿐이라는 관점은 사회 전체에 확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세태에서 소통은 사실 특정 이념을 위한 편향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화두에 불과할 수 있다. 홍보와 정책을 구분하지 못하는 권력층에게 아이소타입의 기법은 또한 선동의 수단으로 비춰질 수 있다. 정보의 평등한 공유는 모두에게 식상한 구호처럼 되었지만, 정보가 사회의 부정적 문제와 연관될 때 그러한 정보는 소통의 영역에서 잘려 나가거나 왜곡되어 전달되기 일쑤다. 다시 말해, 아이소타입의 통합 목적인 N1 N2에서 특히 N2에 담긴 진보성을 처리할 만큼 사회가 성숙한 것은 아니다.문제 자체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은 다양한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노이라트가 우리 모두에게 남긴 하나의 과업이다.


출처 http://goodking.co.kr/